소개
효부성씨 정려비각은 오몽렬의 처 창녕성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695년(숙종 21)에 명정을 받아 11년 뒤인 1706년에 건립된 것으로, 건립 후 두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효부성씨 정려비각 건립 후 140여 년이 흐른 1850년대에 이르러 퇴락한 정려를 후손 오시영(吳始英) 등이 중수했고, 「사적기」를 추가, 보완하였다.
100여 년 후인 1958년에 다시 중수를 하였는데, 후손 오인수(吳寅洙)가 찬한 「정문 중수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가문이 영세하여 정려가 훼손되었지만 돌보지 못하다가 후손 오창선(吳昌先)이 기와 수백 매를 기증하고, 오몽렬의 11세손 오석우(吳錫禹)가 자금을 내어 중수하였다고 한다.
효부성씨 정려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화강암 주춧돌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고, 사방에 홍살을 둘렀으며 방풍막이 있다. 건물 중앙에는 효부성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화강암의 호패형 비석 1기가 있다.
비석 앞면에는 정언 벼슬을 지낸 오자화(吳子華)의 7대손인 오몽렬의 처 효부성씨가 살던 마을임을 적었고, 효부성씨가 정승 성준득의 후손인 참봉 성언홍(成彦弘)의 딸임을 기록하였다. 뒷면에는 증손인 오덕망(吳德望), 오덕성(吳德成), 오덕형(吳德亨)이 주도하여 비석을 건립한 사실을 적었다. 건물 안 뒤쪽에는 창녕성씨의 사적을 기록한 「사적기」가 걸려 있고, 왼쪽에는 1958년에 정려를 중수한 사실을 기록한 「중수기」가 걸려 있다.
효부성씨 정려비각은 보성오씨의 사족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로, 오몽렬의 아들인 오복립이 공주향교?『청금록』에 기록되어 있고, 오몽렬 처 창녕성씨가 명정을 받은 사실과 오몽렬의 현손 오명채가 급복과 증직을 받은 사실이 「정려 중수기」 등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보성오씨가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